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부흥하고 있는 노예제.
우리의 욕망과 무관심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아주 오래된 기억인데 노을 지는게 너무 이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가 "저 하늘이 원래는 푸른색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저런 색으로 보이던 모든 건물과 풀과 나무 심지어 친구의 피부색깔마저 붉게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순간만은 내가 이전에 알던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금만 참아내면 세상은 이내 빛으로 환해지거나 어둠에 숨어들거나 하는 원래 내가 알던 그런 세상으로 돌아오고, 놀란 가슴도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왜 하늘이 붉어졌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된 이후로는 노을을 보고도 놀라지 않게 되고,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잘 관찰하고 적절한 질문만 한다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웬만한 일들은 알아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하늘이 왜 붉어졌을까로 시작된 세상에 대한 작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록 내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는 유쾌하지 못한, 우울하고 슬픈 아니 격분할 수 밖에 없는 진실들이 숨어있었다.
노예.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이야기 안에만 존재했던 불쌍한 영혼. 이제는 현실의 그 누구를 지칭하기 보다 시적인 은유 또는 비유적인 태도나 상황을 지칭하는 사전 안의 단어. 내게는 그랬다. 미국 남북전쟁을 통해 링컨이 "노예해방"을 했다고 들었기에, 미국이 "노예해방"을 했으니 전세계의 모든 노예가 당연히 해방됐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노예를 해방시키면 해방과 동시에 그 노예는 자유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로 복귀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노예. 노예노동. 노예제도. 육체적 구속상태와 인간의 기본권을 다루는 태도 또는 정치제도 안에서 노동과 노동의 결과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이 노예이고 어떤 형태가 노예노동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책 속에는 분명히 국민의 상당수가 노예상태에서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음에도 결코 "노예"라고 규정하지 않고 "더부살이"라거나 "채무에 의한 노동대납"이라거나 "일시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노동상태"라거나 하는 말장난으로 노예상태에 대한 논점을 흐리는 많은 나라들이 예로 제시된다.
우리나라에 분명히 노예제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TV에는 노예"처럼" 일하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노예제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포주에 속박되어 강제로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여성들을 찾아내거나 드러나면 그들이 이 사회에 무슨 해를 가했다는 듯이 희생자인 그들을 도리어 처벌하는 이상한 나라가 이곳 대한민국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티끌의 절반만큼의 위로를 주기도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낸다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자 피곤한 여정이다. 특히,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는, 자리에 앉아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그 책을 통해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려고만 애쓰는 나같은 사람은 내가 이 한권의 책을 읽었으니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 할 자격은 결코 없다. 하지만 책 속에 드러나는 숫자의 1/10, 1/100로 축소시켜도 그 비극의 깊이와 세기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로마의 역사에는 귀족에게 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노예부터 음식맛이 없다는 이유로 붕장어의 먹이로 던져지는 노예까지 나온다. 산업혁명기 공장의 굴뚝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죽은 8살짜리 꼬마 아이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굴뚝으로 들어가는 7살짜리 꼬마 아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이 책에서는 2003년 어느날 6살 짜리 꼬마가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바위틈으로 기어들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7살짜리 여자아이가 20달러에 팔려가 18살까지 제봉틀 밑에서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다가 불구의 상태로 탈출하는 이야기, 42세의 남자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빌린 65센트를 갚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하루에 14시간씩 정과 망치만으로 바위를 깨며 약간의 밥과 술만으로 연명하는 이야기,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10달러 미만의 빚때문에 평생에 걸쳐 노예노동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21세기의 모습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 TV, 컴퓨터에서 청바지와 이상하리 만치 저렴한 옷의 뒤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이다. 잠시 불편해하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픈 이야기들.
관련서적 :
[일회용사람들 - 케빈 베일스 저/편동원 역 | 이소출판사 | 2003년 04월]
[다른 세상의 아이들 - 제레미 시브룩 저/김윤창 역 | 산눈 | 2007년 10월]
[신도 버린 사람들 - 나렌드라 자다브 저/강수정 역 | 김영사 | 200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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